문화 어두운 시대를 환히 빛낸 수원지역 독립운동을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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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21-05-25 12:08본문
‘대한독립의 길을 걷다’라는 제목의 수원시 인문기행 두 번째 코스는 일제 강점기의 수원과 수원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나라를 빼앗겼던 암울한 시대를 기억하는 근대 건축물과 일제에 저항해 독립의 의지를 드높였던 사람들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수원화성을 중심으로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이번 코스는 여행길을 더욱 다채롭게 한다. 총 6㎞를 둘러보는데 3시간가량이 소요된다.
◇연무대~방화수류정
인문기행의 시작은 ‘연무대’다. 220년 전 정조대왕의 친위대인 장용영 군사들이 무예를 연마하던 훈련장으로,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보는 사람의 마음을 탁 트이게 해준다. 지금은 연날리기, 활쏘기는 물론 하늘 높이 올라 수원화성을 내려다보는 헬륨 기구 ‘플라잉수원’ 등의 체험이 이뤄지는 평화로운 곳이다.
그러나 102년 전 연무대에서는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는 민초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수원 장날이었던 1919년 3월 16일, 서장대와 연무대에 수백 명의 수원사람들이 모여 ‘만세’를 외치며 팔달문과 종로 방향으로 만세 시위를 이어갔다. 일본의 침탈로 내몰린 상인들이 중심이었다고 한다.
연무대에서 10분가량 걸어 내려오면 용두암이라는 바위 위에 세워진 아름다운 정자 ‘방화수류정’이 있다. 누구나 한눈에 반할 만한 풍광의 방화수류정은 수원지역 만세운동의 발화지다. 수원에서 나고 자라 서울로 유학한 지식 청년들을 주축으로 연무대보다 보름 앞선 3월 1일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독립의 결의로 가득 찼던 방화수류정 일대는 100여 년이 지나 정자를 둘러싼 용연과 화홍문의 절경을 배경으로 피크닉을 즐기는 명소가 됐다. 정조의 애민 정신의 씨앗이 수원지역을 살아가던 평범하고 의로운 사람들의 희생과 저항을 거름 삼아 오늘날 연무대와 방화수류정에서 많은 사람이 누리는 평화로운 일상으로 피어난 셈이다.
◇수원동신교회~수원종로교회
방화수류정에서 화홍문으로 방향을 잡아 수원천을 따라가는 길에는 일제 강점기 수원지역의 종교와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한 역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제일 먼저 ‘수원동신교회’는 독특한 외벽 색과 건물 디자인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한복을 입고 짚신을 신는 등 한국식으로 생활하며 선교활동을 벌이던 노리마츠 마사야스가 1900년 8월 수원에 설립한 ‘성서강론소’가 110년 동안 이어진 역사가 오래된 교회다.
조금 더 내려오면 ‘매향중학교와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가 있다. 1902년 수원 최초의 여성 근대교육기관으로 설립돼 독립 영웅들을 배출해 낸 삼일여학교가 전신이다. 교문 앞 매향교는 비가 오면 수원천이 범람해 등교에 어려움을 겪던 학생들을 위해 당시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이자 삼일여학교 학감이던 김세환이 다리를 놓은 자리에 세워졌다. 또 삼일여학교가 현재 위치에 자리를 잡고 발전하는 데 30여 년간 헌신했던 밀러 교장을 기리는 기념비가 교정을 지킨다. 기념비 전면에는 그녀의 한국이름(미라)을 따라 ‘미라교장기념비(美羅敎長記念碑)’가 한자로 적혀 있다.
삼일중학교 교정에 위치한 ‘아담스기념관’은 삼일학교의 상징이다. 개화기 서양 문물과 함께 유입된 기독교가 설립한 교육기관으로, 초가집에서 서당 형태로 시작됐다. 이후 수원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독립운동가 임면수 선생이 사재인 과수원 부지를 기부해 1909년 삼일학교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미국 노스 아담스(North Adams) 교회의 도움으로 임면수 선생이 공사 감독을 맡기도 했다.
매향교를 건너면 북수동성당을 만난다. 1897년 팔부자집 중 한 채를 구입해 예비자들을 받으며 시작된 성당은 1931년 뽈리신부가 부임해 수원시 최초의 고딕성당을 세울 정도로 발전했다. 최초의 사립초등학교인 소화강습소(현 소화초등학교)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한글로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던 학교가 떠난 뒤 뽈리화랑으로 활용되고 있는 건물은 등록문화재 제697호다.
수원지역 천도교당의 본거지이자 3·1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천도교 수원대교구’는 팔부자집을 구입해 사용하다 북수동성당에 내주고 현재는 창룡문 근처 남수동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소실된 종각을 2008년 복원한 여민각 맞은편에는 ‘수원종로교회’가 있다. 붉은 벽돌에 푸른 지붕을 인 건물은 수원의 아픈 역사와 격변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삼일여학교와 삼일학교 등 최초의 근대교육을 시작했고, 3·1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을 이끌었다. 김세환, 이선경 등 독립지사도 출석했다고 알려졌다.
◇화성행궁~김세환 집터
길을 건너 ‘화성행궁’은 김향화를 비롯한 수원기생 30여 명이 만세운동을 했던 특별한 곳이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엔 관아 건물로, 임금이 행차했을 때는 임시 별궁으로 576칸의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정조대왕이 재위 24년 중 13차례나 머무른 의미가 큰 곳이다. 그러나 일제는 화성행궁을 헐어 병원으로 활용했다. 1919년 3월 29일 봉수당에 들어섰던 자혜의원으로 위생검사를 받으러 간 기생들은 화성행궁의 중심인 봉수당과 일제경찰서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의로운 기상을 떨쳐 보였다.
팔달산 정상에서 수원화성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서장대’도 민족의 정기가 드높다. 두 번째 인문기행의 첫 시작점인 연무대와 함께 3월 16일 수원장날 만세운동이 일었던 곳이다.
성벽을 따라가면 ‘3·1독립운동기념탑’과 ‘대한민국독립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대한민국독립기념비는 1949년 1월 16일에 만들어져 중포산에 있던 동공원에 세워졌는데, 1969년 10월 15일 3·1독립운동기념탑을 세울 때 이곳으로 함께 옮겨졌다. 대한민국독립기념비는 만세운동을 탄압하다 처단된 일본 순사 노구치의 순국비를 해방 후 수원시민들이 깨트려 버리고 그 위에 세웠다. 특히 당시 학생과 시민의 성금으로 세워진 기념비가 수원의 중심에서 수원시민들의 일상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김세환 집터’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수원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김세환(1889~1945)이 살던 터다.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인 김세환은 수원과 충청지역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삼일여학교와 수원상업학교 등 교육자로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수원지역 근대사를 따라가는 ‘수원의 근대를 걷다’는 순회전시를 지속한다. 6월4일까지 경기남부지방경찰청 본관 3층 로비에 전시된 뒤 6월5일부터 6월25일까지 3주간 수원고등법원 1층 로비에서 시민들을 만난다.
수원시 관계자는 “두 번째 인문기행은 숭고한 희생으로 대한독립의 길을 열고자 노력한 수원지역 애국지사와 조력자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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